[연재-6] 하나님 나라와 선교 |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

카리스마적인 사역과 사회적 참여, 전도와 기사와 표적 등의 사역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선교와 연관되어 규정되어야 한다 (Graham Cray, 1999: 43).

그리스도인은 철수하는 자가 아니고 침투하는 자이다 (그래스).


우리는 앞에서 교회가 천국 복음의 선포자라는 것을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선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어떤 특징들을 이 세상에서 구현해 나가는 것인가?

선교라는 것은 처음에 서구 사회가 비서구 사회에 대해 복음을 전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선교라는 것은 비서구 세계의 기독교화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서구 기독교의 우월주의나 식민주의의 위험성과 쉽게 연계되었다. 이것은 여러 비서구 세계(예, 인도나 중국)나 이슬람 국가권에서 기독교 선교와 서구 제국주의를 동일시함으로 복음전도를 배타적으로 거부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비서구 기독교의 약진으로 이제 선교는 더 이상 비서구 국가들에 대한 전도 활동으로만 간주될 수 없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교회사에서 최초로 비서구 기독교인의 수가 서구 기독교인의 수를 능가하게 된 것이다. 이제 선교는 6대륙 안에서 6대륙을 향해(mission in and to six continents)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선교는 또 타문화권 혹은 해외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도 이해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교회의 본질과 선교적 사명을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 선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제(significant agenda)중의 하나는 바로 선교가 전도인가 아니면 사회참여인가 하는 문제였다.

전도인가 또는 사회참여인가?(Evangelism or Social Action?)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도가 선교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전도와 선교를 구분해 왔다. 즉 전도라는 것은 교회의 전체 활동에 있어서 하나의 본질적인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보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교회의 봉사 사역이 전도 사역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선교가 바로 전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해 왔다. 선교와 전도를 동일시하는 주된 이유는 만약 전도가 교회 선교의 한가지 측면으로 이해된다면 전도가 점점 그 우선순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지는 비기독교인들도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가치있는 활동들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교와 전도를 구분하면서 전도의 우선순위에 대해 강조하였다. 전도와 사회봉사, 즉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복음의 실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들은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들은 선교가 전도보다 광의의 개념이고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은 전도에 대한 우선적인 헌신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입장들은 전도나 선교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나 강조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에 대한 로잔 위원회의 그랜드 래피즈 보고서(Grand Rapids Report)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의 근원적 동기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성품에 있다고 말한다(존 스토트, 1986). 이 보고서는 교회는 복음의 선포와 아울러 구제, 정의와 평화의 추구 등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천명한다.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복음을 선포하려고 할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일원론적 혼돈과 이원론적 분리였다. 전자는 20세기 초반 사회복음 운동이 발생시킨 하나님 나라와 사회민주주의와의 혼동이었다. 후자는 영육의 이원론에 입각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에 대한 분리적 시각이었다. 이 보고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사회적 의미와 연관성을 가지며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복음전도에 기여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한다.

선교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참여를 구분짓는 논쟁에 대해서 화융(Hwa Yung)은 서구의 이원론적인 전통에서 그 역사적인 근거를 찾는다(Yung, 1997: 44-55). 이원론은 개인적 지성과 외부 세계, 영혼과 육체, 영과 물질, 주체와 객체, 사실과 가치, 종교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구분하여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이러한 서구의 이원론은 헬라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계몽주의 사상(Enlightenment Thought) 이후로 더욱 극대화되었다.

선교에 대한 이원론의 영향력은 분명하다. 선교를 전인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원은 영적인 것인가 또는 육체적이고 사회 정치적인 것인가? 영혼이 더 중요한가 육체가 더 중요한가? 선교는 전도인가? 아니면 인간화인가?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영역에서만 역사하시는가? 아니면 물질적인 영역에서도 역사하시는가?(만약에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영역에서도 역사하신다면 치유나 기적 같은 것은 기대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서구의 이원론은 구원의 영적인 면과 개인화를 초래하였고, 선교에 있어서 전도가 중요한가 사회참여가 중요한가 하는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유고 조릴라는 정의가 복음의 기초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물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1990: 54). 물은 수소 두 분자(H2)와 산소 한 분자(0)로 구성되어 있다. 물은 이 외의 다른 것으로 구성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과산화수소(H2O2)는 살충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를 더 마시거나 덜 마실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도 말과 행동 중 어느 한가지만 강조할 수 없다. 기독교회가 복음의 생활화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만 강조점을 둔다든가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의 사건의 선포를 벗어나서 사회참여에만 힘쓰는 것은 밸런스를 상실한 것이다.

복음은 교회의 증거를 통해서 구체화되는 것이지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계시가 아니다. 진정한 복음 전도는 교회의 메시지와 사역을 통해 구체성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복음의 변혁적인 능력에 대한 살아있는 간증을 떠나서는 진실된 전도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래서 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는 사역적 개념으로는 구분(distinction)이 가능하지만 상호 분리(separation)될 수 없다. 양자는 결혼관계와 같이 긴밀히 상호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는 전도와 사회참여의 구성요소들 이상의 것일 수 있다. 데이빗 보쉬는 전도는 선교의 한가지 구성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원이며 선교는 전도와 사회참여를 합한 것 이상으로 역동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Bosch, 1989: 28-32). 선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 세상 안에 구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주체가 인간이나 교회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대리인으로 사명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해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은 선교 역사에서 부정적으로도 혹은 긍정적으로도 이해되어 왔다. 이 용어는 1952년 국제 선교 위원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윌링겐 회의(Willingen Conference)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단어의 주요한 초점은 전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들과 활동들에 대한 것이었다. 이 단어의 광범위한 해석과 사용은 선교의 본질에 대한 여러 종류의 선교학적 성찰들을 가능하게 하였다.

요한네스 호켄다이크(Johannes C. Hoekendijk) 등이 발전시킨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은 선교의 초점이 인간화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본질은 그 기능(즉 그리스도의 사도적 사역에 대한 참여)에 의하여 충분히 규정될 수 있으며”(Hoekendijk, 1967:40),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선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고 교회와의 관계는 이차적인 것이다. 호켄다이크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없는 것이다. 교회 정체성의 위치는 인간됨의 복지와 참된 인간화를 위한 사회 정치적 행동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선교의 우선순위를 인간화(humanization)에 둠으로써 선교에 대한 전인적 이해와 그리스도의 사건의 중심적 위치를 흐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앤드류 커크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Andrew Kirk, 1999: 25-30). 그는 하나님의 선교가 본질적인 특징들을 보여주기보다는 하나의 슬로건(a slogan)같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실체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선교를 행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특별한 특징들을 가진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만약 서구의 어떤 철학자들처럼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the Ground of Being) 또는 “궁극적 실재”(the Ultimately Real)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있어 선교라는 것은 부적합한 개념으로 보여진다. 선교라는 것은 인격성(personality)과 헌신(commitment)을 가정하는 활동이다. 비인격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극단적인 모호성이나 무신론적 입장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아니라 인간의 선교(missio hominis)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 활동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창조와 인간 역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이유들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에밀리오 카스트로(Emilio Castro)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재권 아래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오도록 온 피조물을 모으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은 삼위일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를 논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종교  전통이 하나님을 다른 식으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다른 종교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섞는 종교 다원주의적 접근은 혼란만을 초래할 뿐이다.

넷째,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상과 역사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교의 삼위일체적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호관계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매우 인격적인 실체이다. 근대의 선교에 대한 이해에서 하나의 본질인 공동체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고가 중요해지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을 상대방에게 줌으로써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주는 것”(self-giving)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선교란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사랑의 존재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극명하게 보여진다. 신적인 사랑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아에의 함몰)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희생을 통해 존재한다. 요한일서 4장 10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서 가장 선명하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해 이해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선교 활동에 대해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희생의 삶(십자가)으로 선포된 천국복음은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복음 전파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테판 닐(Stephen Neill, 1959: 81)의 유명한 경구인 “만약 모든 것이 선교이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if everything is mission, nothing is mission)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교는 단지 인간적 측면의 인간화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신적 측면의 인간화(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를 지향하는 활동임을 기억해야 한다. 선교의 목적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것으로 종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선교의 본질과 하나님의 나라 (The Nature of Mission and The Kingdom of God)

선교(mission)를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하여 규정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수단”(Shenk, 1996: 90)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또한 선교적 사명을 위해 성령께서 이 세상 안으로 보내신 하나의 운동으로 말할 수 있다. 교회가 이 세상에 보내진 성령 안에서의 하나의 운동으로 이해될 때, 선교는 더 이상 교회의 하나의 과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본질 그 자체이다. 선교란 자신을 희생하여 밖으로 뻗어 나가는 하나님의 본질(the nature of God that is reaching out in sacrifice)을 반영하는 것으로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것이다. 우리가 선교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이 세상에서의 성령의 운동으로 정의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선교에 있어 질적인 변화를 볼 수 있게 된다. 교회 생활과 선교의 모든 영역은 교회의 제도적인 자기 보존보다는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를 촉진시키는가 하는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앤드류 커크(Andrew Kirk)는 교회를 선교의 목적(the goal of mission)으로 보는 관점과 선교의 대리인(the agent of mission)으로 보는 관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선교의 중요한 대리인이다. 커크는 앞으로 미래에도 지속될 선교의 경향성을 네 가지로 예측하고 있다(Kirk, 1999: 230-231).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신앙 공동체에 초점을 둘 것이다. 이들은 기독 공동체의 성장에 원칙적으로 헌신하지만, 회심자의 숫자보다는 제자도의 질에 더 강조점을 두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제도적인 교회의 중요성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인간 역사의 운동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의 징표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타종교인이나 세속인들에게 용납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바라보며 사회 참여에 강조점을 두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를 강조할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전도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적합한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선교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다른 문화적 환경에 복음을 적용하는 창의적인 방법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들은 효과적인 복음 전도와 기독교인의 양적 증가에 강조점을 둘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그룹은 앞의 세 가지 강조점의 최상의 단면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의 선교학은 공통의 사회 정치적 의제에 함께 관심을 가지면서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증거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들은 “너희는 세상에 가서”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아무런 배타지역(exclusion zones)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 필자는 앞으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이 마지막 네 번째 그룹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으로 믿는다.

올란도 코스타스(Orlando Costas, 1979: 75)는 “복음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 참여가 우선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이다”라고 말하면서 “선교의 진실된 시험대는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가, 제자를 만드는가, 사회 경제 정치적 이슈들에 참여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이고 역동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증언으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냐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선교의 과업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일관성 있고 통일성 있게 경험하고 제시하는 일이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증표요 선경험이요 대리인이라면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어떤 측면들을 구현해야 하는가? 카리스마적 성공회의 목사인 엔드류 로드(Andrew Lord, 1997)는 교회의 선교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전조(the eschatological foretaste)이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선교 종말론(mision eschatology)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7가지의 특징으로 구성된 전인적인 선교 패러다임을 발전시켰다.

1.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사람들(People acknowledging Jesus as Lord):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할 것이다. 선교는 모든 사람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삶에 구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선포는 하나님 나라 선교(kingdom mission)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 요소가 된다.

2. 고통 혹은 죽음이 없는 완전한 치유(Healing, without suffering or death): 하나님 나라에서는 온전한 치유가 존재할 것이다. 카리스마적 또는 오순절 교회들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선교에 있어서 육체적 치유와 전인적인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예수님도 사역의 많은 부분을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사용하셨다. 전도냐 사회참여냐 하는 논쟁에서 간과되었던 것이 치유와 축사 등의 선교 영역이었다.

3.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완전한 정의와 평화(Perfect justice and peace, where God rules):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될 것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 남자와 여자, 힘이 있는 자와 소외된 자 등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평화롭게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공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세계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4.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의 일치성(Unity in a diversity of people):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국가, 그리고 교파들로부터 온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거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온전한 하나됨을 이룰 것이다. 선교는 다양성 가운데 거룩한 에큐메니즘을 지향해야 한다.

5. 해방된 피조물(Creation set free): 구원의 완성은 온 세계의 모든 피조물에게 다 이루어질 것이다. 피조물의 신음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자연의 환경도 파손됨이 없이 아름답게 완성될 것이다. 생태학(ecology)은 경제적 정치적 정의와도 연관성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들과 피조물이 거주하고 있는 지구 환경의 상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6. 찬양과 경배(Praise and worship):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예배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찬양은 우리의 영성을 나타내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교회는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찬양하는 감격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배가 살지 않으면 교회의 생명력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

7. 사랑과 교제(Love and fellowship):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본받아 온전한 사귐이 있게 될 것이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참된 형제애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어야 한다.

로드의 선교에 대한 전인적인 관점은 선교의 본질과 선교의 실제에 도움과 도전을 준다. 교회의 선교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생생한 특징들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교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특징들을 현재로 끌어와서 현 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역이다. 만약 기독교 복음이 단지 죄사함의 문제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이라면 우리는 보다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는 선교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노력들을 상호 이해해주며 전인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교(Holistic Kingdom Mission)를 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6장부터는 로드의 통찰력을 기초로 하여 필자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 10가지를 뽑아 하나님 나라의 10대 선교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교회는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소명을 받았다.

생각해 볼 문제

1.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교회성장 가운데 어떤 순서대로 그 개념이 크다고 볼 수 있는가?

2. 복음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이 부정적으로 느껴진 것은 왜 그런가?

3.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에 비추어볼 때 한국 교회의 선교가 개선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4. 여러분에게 가장 강력하게 연상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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