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9] 하나님 나라의 영성

교회의 사명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사역을 수행하는 방법은 철저히 하나님 나라의 영성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홍영기).

영성이란 결코 성령님의 기계적인 작용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이 영성적인 존재라 함은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님을 향하여 자발적이고 인격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육신의 욕구들을 통제하고 성령님의 뜻을 인격적으로 수용해 나감으로써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이루어 나간다 (유해룡, 2001: 406).

예수를 닮기 위해 묵상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다 (Sundar Singh).

영성이라는 단어가 21세기 사회의 하나의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포스트 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영성이라는 단어는 초월성에 대한 신비한 경험과 종종 연관된다. 그러다 보니 ‘불교적 영성’, ‘뉴에이지 영성’, ‘아프리카 영성’ 등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하면서 영성의 기독교적 의미는 점차 불명료해지고 있다. 비기독교적이고 혼합적인 종교적 영성의 특징은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초월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기 구원이나 자기 통치 식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폴 토아스페른이 말하는 것처럼 구원과 자기 구원 사이에 중간 방도는 존재하지 않는다(1992: 225). 현대 교회는 비기독교적인 영성을 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세우는 영성을 선포해야 한다.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성의 본질과 방향성에 대해 성찰하려고 한다. 교회의 사명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사역을 수행하는 방법은 철저히 하나님 나라의 영성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영성의 신학적 기초: 하나님과의 친밀함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spirituality: intimacy with God)

하나님 나라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가 절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성 생활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은밀성을 강조하였다(마 6:5-6). 그리스도가 은밀성을 강조한 이유는 영성 생활이 본질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며 그 관계를 통한 나 자신의 변화에 있기 때문이었다(김영봉, 1995: 98).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서서 크게 기도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에 형식화되고 정형화된 관습적 기도보다도 은밀한 골방의 기도, 다시 말해서 진실한 기도의 원칙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진실된 친밀함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의 영성 생활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아바’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되었던 아람어였다. 예수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한 자가 없었고 이후에 이 용어는 초대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강력한 친밀감이 아니면 이렇게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에세네파 사람들은 율법 준수를 영성 생활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러나 율법 준수는 영성 생활의 결과,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외적인 율법보다도 내적인 마음의 새로워짐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시되어 온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영성훈련학의 대가인 게리 토머스(Thomas, 2001)는 “거룩한 행로”(Sacred Pathways)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식에 뜨거운 예배, 성도와의 교제, 독서, 봉사, 성례, 묵상과 기도, 자연의 체험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방법들은 영성 개발을 위한 거룩한 도구들이다. 리차드 포스터(1995) 또한 영성의 내적 훈련으로 묵상, 기도, 금식, 학습, 외적 훈련으로는 단순성, 고독, 복종, 섬김, 그리고 공동체 훈련으로는 고백, 예배, 성령의 인도하심, 기쁨의 훈련 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55: 6)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영성은 고행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내주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성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임을 보여준 것이다(롬 14:17). 교회의 영적인 실체는 정치적인 힘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의 충만함으로 측정된다. 그러므로 영성의 개발 혹은 영적인 삶은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강건케 하시는 성령과 함께 행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포올 토아스페른, 1992: 218). 바울이 “영을 좇는 자”가 되라고 말할 때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한 것이다(롬 8:5-14). 바울이 의미하는 영성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 영성은 비기독교적 영성과 분명히 구분된다(유해룡, 2002: 21-37).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노력과 분리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옛 격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두 걸음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의 근원적인 힘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역자들은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로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슥 4:6). 참된 영성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함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영성의 신학적 형태: 십자가 지기 (The theological form of spirituality: taking up the cross)

하나님 나라의 영성은 십자가를 지는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겸손과 자기부인 그리고 순종의 삶으로서 영성의 외적인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은 “비움과 순종”(self-emptying and obedience)이라는 외적 형태로 나타났다(빌 2장).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에서 공명심이나 공로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분은 자기의 의를 쌓는 바리새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온 목적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말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리스도는 자신의 특권이나 기득권을 버리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거룩함과 겸손 그리고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교회 지도자일수록 더욱 높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은혜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십자가의 영성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은혜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헨리 누웬(Henry J. M. Nouwen)은 십자가를 지는 영성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심리학, 목회 신학, 기독교 영성을 강의했던 교수요 성직자였다. 유명세를 타던 그가 어느 날 50대가 되면서 내적인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다. 25년의 성직자 생활과 교수 생활을 하던 그에게 한가지 질문이 던져졌다. 그것은 “나는 나이가 들면서 더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는가?”(Did becoming older bring me closer to Jesus?) 라는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도 잘 못하며, 유명하지만 사람들과 단절된 삶을 살며, 너무 바쁜 일로 생활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헨리 누웬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자신의 삶의 변화를 간절히 구하였다. 그 때 정신병 환자들 또한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토론토의 라르케 공동체(L’arche community)로 가라는 소명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아라. 내가 너를 치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누웬은 하버드 대학에서 라르케 공동체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주에 대해 “세상의 지배에 대한 소원으로부터 사회의 필요에 소외된 자들에게로의 이동”이라고 고백한다. 누웬은 그 곳에서 정신적인 병자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복음이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교회는 사람들로부터의 화려한 칭찬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법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과 겸손함, 자기 희생과 순종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성의 신학적 기능: 사회 변혁 (The theological function of spirituality: social transformation)

하나님 나라의 영성은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성 생활을 강조하였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영성은 내면적인 차원에 그쳐서는 안되며 자신의 삶 가운데 실천으로 이어져야 했다. 영성은 윤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무와 열매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강조하셨다(마 7:21). 영성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구현하는 힘이다. 개인 자신의 건덕이나 위로만을 추구하는 것은 총체적 기독교 영성이 아니다. 영성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기초를 두고 십자가의 삶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또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서 배고프고 소외된 자들, 죄인들과 함께 거하였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영성이 사회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Padilla, 1999: 453). 구원이 고립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라고 말하는 복음은 총체적인 진정한 기독교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회심과 개인적 헌신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듭난다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종교 경험 훨씬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가시적인 비전이 된다.

“저 세상적인 영성”(otherworldly spirituality)은 때때로 사회적인 무기력감(a sense of social impotence)을 느낄 때 발생한다(Weng, 1994: 31). 그러나 영성이 사회적 병리 증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영성은 사회적인 증인의 역할을 방해하는 영적인 기형(deformation)을 지양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취해야 할 영성의 모습은 본 훼퍼가 말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the form of Christ in the world)이라는 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본 훼퍼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교회는 우리 가운데 숨어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성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력과 공신력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적인 삶은 사회의 각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나눔의 상징(symbol)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다. 나눔의 영성은 교회의 사회적 영성을 발전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나누는 삶을 습관화해야 한다. 이에 대해 도날드 크레이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Kraybill, 1978: 116):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보물이 되면 우리의 삶은 축적하는 삶에서 주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 나라에 목표를 두고 우리의 소유를 기꺼이 나누어주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난한 자를 회복시키고 자유케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회복 시키고 자유케 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세계의 절대 빈곤자 숫자가 12억 명에 달하고 있지만 빈곤 극복은 달성 가능한 목표라며 이를 상징하는 통계수치들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세계 3대 억만장자들의 보유 자산은 49개 최빈(最貧) 저개발국(Less Developed Country)에 거주하는 6억 명의 연간 소득을 합산한 것을 훨씬 초과한다. 또한 매년 유럽에서 아이스크림 소비에 110억 달러가 지출되고 있으나, 전 세계 모든 어린이에게 기초교육을 제공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60억 달러이다. 현대 교회가 교인들의 나눔의 영성을 개발할 수 있다면 이 사회에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가 비추어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열매들은 이 세상에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예배와 공적인 삶, 전도와 사회참여, 신앙과 봉사, 기도와 실천을 동시에 초래하는 통합적 영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Padilla, 1999).

영성의 신학적 초점: 종말론적 희망 (The theological focus of spirituality: eschatological hope)

하나님 나라의 영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소망에 궁극적인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그 날을 소망한다. 그리스도의 영성의 근거는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소망에 있었다(김영봉, 1995: 105).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새 창조의 시작이 자신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었고 이 종말은 심판으로서가 아니라 구원과 은혜로써 다가왔다고 선포하셨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과 친히 함께 거하시며 영원히 통치하는 그 날을 환상으로 바라보았다(계 21:1-4). 이 땅에서 교회가 선교하는 목적도 또 선교를 할 수 있는 능력도 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고난 가운데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불타오르는 종말론적 소망 때문이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통하여 종말론적 소망의 영성을 엿볼 수 있다.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이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B.C. 588-587)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다. 당시 50대 중반의 나이였던 예레미야는 조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하였기 때문에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체포되어 시위대 뜰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친척 한 명이 찾아온다. 그는 예레미야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었다.

하나멜은 예레미야에게 고향 아나돗에 있는 자기 밭을 사 달라고 부탁하였다. 레위기 25장에 의하면 지파나 가문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누군가 토지를 팔았을 경우에 가까운 근족이 그 밭을 대신 사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때는 전쟁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기근과 염병이 돌고 있었다. 유다가 강대국 바벨론을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때였다.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그런 때에 감옥에 갇혀서 언제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이 그 곳에 정착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밭을 샀다. 외관상으로는 밭을 샀지만 실제로는 희망을 산 것이다.

예레미야가 밭을 산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의 징계 후에 다시 그 땅을 회복해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32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고 말하셨다. 여기에서 ‘다시 산다’는 히브리어는 ‘구속’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예레미야 33장 15절의 말씀처럼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래하는 나라에 대한 비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밭을 산 행위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행위요,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의 상징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밭을 사는 행위를 공적으로 증거하심으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전파하게 하셨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밭을 살 때 매매 증서 2장을 쓴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잘 인봉하여 영구 보존용으로 잘 싸서 토기 속에 넣어 두었고 또 하나의 문서는 공개해 놓았다. 예레미야는 이 계약을 사촌과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시위대 뜰 앞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행하였다. 왜 그렇게 한 것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전파해야 했다: “보십시오. 이것이 지금은 쓸모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이 땅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 밭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징적 행동을 통하여 희망을 창조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예레미야 32장 14절에 보면 그 매매 증서를 “많은 날 동안 보존케 하라”고 말한다. 나중에 인봉한 문서는 그 땅에 사람들이 돌아와 거주하게 될 때에 매우 중요한 증거물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증거물이 될 것이요 예레미야의 희망과 믿음에 대한 증거물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희망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희망을 창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꿈을 전달하는 메신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선포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종말론적 긴장 사이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땅을 매입할 소망을 가져야 한다. 현재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고, 모든 고통 후에는 완전한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장래에 어떤 것이 닥칠지 알지 못하지만 누가 오실지는 알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매일 만나는 분이시며 또 종말에 만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롬 12:12), 소망 중에 인내하며(살전 1:3), 소망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요일 3:3).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불꽃이 꺼진 영성은 참된 영성이 아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Your Kingdom Come)

만약 단 한 마디의 기도문을 만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겠는가? 필자는 나의 삶과 우리의 공동체 그리고 전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성만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한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려면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조조정(restructuring)해야 한다. 섬기는 왕이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Padilla, 1999: 452).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고”(눅 4:18-19) 세상에 보내졌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생명을 주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필자의 꿈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구현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1)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 공동체; (2)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 공동체; (3) 사람들의 몸과 정신과 영혼을 치유하는 치유 공동체; (4) 모든 성도의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은사 공동체; (5)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실천하는 일치 공동체; (6) 진정한 경배의 영성을 가진 예배 공동체; (7) 사회의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정의 공동체; (8) 평화의 사도요 중개자가 되는 평화 공동체; (9)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환경 공동체; (10)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서로 섬기는 사랑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라는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역사(history)는 하나님의 이야기(His story)이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문화를 통해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해 오셨다.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야기를 증거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이루실 때 우리는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과 경배를 그분께 영원토록 올려드릴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이 영광스러운 사역에 부름을 받았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생각해 볼 문제

  1. 여러분과 교회의 기도 생활에 대해 나누어 보고 더 깊은 기도의 영성을 개발 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라.
  2. “단순한 삶의 양식”(simple life-style)을 체득하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필요한 요소들은 무엇이 있는가?
  3. 종말론적(하나님 나라의) 희망의 영성을 드러내는 사례들을 성경에서 찾아보고 그 의미에 대해 토의해 보라.
  4. 이 책에서 제시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통합적 영성의 발전을 위하여 한국 교회 내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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