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8]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세속화의 결과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교인과 비교인, 신자와 불신자가 구분이 안되게 된다. 그래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 문제가 심각해진다. 즉 헌신이 없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영성을 약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능력을 제약하게 만든다 (홍영기).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 현대 교회의 무능력은 교회가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현대 교회가 세속화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연약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화되고 있는 교회(The Church Being Secularized)

오늘날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은 세속화(secularization)이다. 세속화는 매우 교묘하게 가장된 적이다. 그것은 기독교와 유사한 모습으로 가면을 쓰고 교회에 침투한다. 기독교가 이미 전파된 후에 세속화된 도시에서 전도하는 것은 다원적인 종교를 가진 도시에서 전도하는 것보다도 훨씬 힘들다. 그래서 세속화보다도 오히려 공산주의와 같이 드러내고 기독교를 핍박하는 편이 복음전도에는 훨씬 나을지 모른다. 역사상 세속화는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세속화의 공격은 근대 사회에 일어났다. 서유럽의 교회들은 이러한 세속화의 공격에 맥을 못 추고 쓰러져 왔다. 그러면 세속화란 무엇인가?

오스 기니스는 세속화를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적인 사고나 제도의 직접적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밖으로 움직이는 과정”(Guiness, 1983)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기독교의 세속화란 “사회적 삶의 영역들이 기독교 복음의 영향에서 이탈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과 기독교 복음(혹은 신앙)이 별 연관성이 없게 되는 것이 다. 세속화는 기독교의 활동을 제약하고 기독교의 능력을 감소시킨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세속화의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예를 들어, 1900년경 무신론자와 무종교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했지만 이 비율이 1980년대에는 21%로 급증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세계 종교 지도(religious map)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이다. 세속주의자들, 혹은 종교적 헌신이 없는 자들이 급증하게 된 것이다. 헨드리쿠스 벌콥(Hendrikus Berkhof)은 1958년 초에 “세속화는 복음의 자식, 그러나 그 어머니에 대해 반항하여 일어나는 자식이다” 라고 말하였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속화가 근대 사회에서 발전하게 된 것은 합리주의와 인간 이성의 우위와 자율성을 추구하는 근대성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속화가 발생하게 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교회에 깊이 삼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왕성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문화와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의 사용과 생활방식이 전적으로 변화되는 문제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관의 변혁이 일어나지 않은 세속화된 교회는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모르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의 변혁 (Transformation toward Kingdom Values)

교회는 세속적인 가치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교회의 사회성(sociality)과 영성(spirituality)은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 교회의 발은 비록 땅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정신은 하늘에 있어야 한다(골 3:1). 종말론적인 교회는 세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을 변혁시켜야지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The church is in the world and for the world, not of the world).

피터 레이싸트(Peter Leithart, 1993)는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세상을 대적하는” (against the world for the world)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교회가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과 생명으로 침투해 들어갈 때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교회는 마치 바다 위의 배와 같다. 배는 바다 위에 존재해야 그 의미가 있다. 바다가 없는 배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배에 바닷물이 침투한다면 배는 가라앉기 시작하고 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 안에 있어야 하지만 세상의 가치에 오염되고 지배된다면 세상을 변혁하기는커녕 오히려 존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6장 19-34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영적 실체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실체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내적이고 영적인 상태인데 이것은 사람들의 삶의 우선순위로 평가될 수 있다(왈터 챈트리, 1993: 14).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의식주 생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인가? 이 세상의 가치관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목숨, 부모나 처자 등 가정을 포함한 모든 가치있는 일들도 만약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눅 18:29; 막 10:29; 마 19:29). 그리스도는 권리와 자기 부인, 재산의 소유와 희생, 그리고 결혼과 금욕을 대조시켜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재물이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나 금욕 생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체계와 생활 양식보다 훨씬 고상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하나님 나라야말로 지고의 선이며, 모든 인간적인 관심과 희생을 다 바쳐야 하는 목표였다(헤르만 리더보스, 1987: 362). 모든 것은 왕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중심으로 생각되며 실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산상수훈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인 요구에 대한 양심화의 과정 (a process of conscientization)이 필요하다(Padilla, 1999: 451). 이러한 양심화의 과정은 사회의 모든 계층들-예를 들어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요구되는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것을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난한 자는 숙명론(fatalism)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창조적인 참여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탐욕의 영, 개인적인 야망의 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기득권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성경적 가치관으로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지속적으로 점검(screening)해야 한다. 지면상 여기에서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대해 상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세상 사람은 대접을 받으려 하나 그리스도인은 남을 대접해야 한다.
  2. 세상 사람은 지도자로 군림하려고 하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
  3. 세상 사람은 남과 경쟁하려고 하나 그리스도인은 타인과 협력해야 한다.
  4. 세상 사람은 원수를 갚으려 하나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5. 세상 사람은 힘으로 남을 정복하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희생으로 감동시켜야 한다.
  6. 세상 사람은 자신의 제국을 세우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워야 한다.
  7. 세상 사람은 인간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8. 세상 사람은 자신의 죄성에 대해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죄성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9. 세상 사람은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
  10. 세상 사람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성공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인정 받으며 그분께 성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 갈 수 있다. 외국에 사는 한국인의 행동이 한 개인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것처럼 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교회 혹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명하셨다. 본훼퍼는 헌신이 없는 기독교는 죽은 기독교라고 강조하였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는 불가피하게 제자도가 없는 기독교이며 제자도가 없는 기독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이다”(Bonhoeffer, 1959: 64).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기득권과 욕망, 사람들의 인정과 탐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향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Church Growth and Kingdom Values)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고 실존해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신 것이다. 즉 인간관계 속에서의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며 실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이다. 레슬리 뉴비긴은 살아있는 신앙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증거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해석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맛보기 시작한 공동체이다……그러한 살아있는 공동체의 해석학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단지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프로그램에 불과하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1980:19).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증표요 살아있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비추어서 항상 점검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부합되는 교회성장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회심 성장(conversion growth)과 같이 여러 가지 많은 그림들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는 특별히 두 가지를 예들 들어 언급하고자 한다.

1. 상호의존으로서의 성장(Growth as Interdependence)

파트너십 가운데 상호의존하며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부합한다(cf. Hong, 2000). 교회와 지도자들은 한 분이신 만왕의 왕의 종으로써, 이 세상 제국이 아니라 영원한 왕국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 세상의 제국은 그리스도보다는 자신의 자아를 높이며, 보이지 않는 거룩한 사역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귀하게 여기며, 협력보다는 경쟁을 조장하고, 책임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게 행동한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서는 오직 한 분의 왕과 오직 하나의 왕국만이 있을 뿐이다. 교회는 상호의존의 원리(the principle of interdependence)를 가지고 협력해서 일해야 한다. 이것은 각 지체가 전체 시스템에 통합되는 체계가 각 지체들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기능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의존의 원칙은 지역 교회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 전체의 몸에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호 의존의 모델을 초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거쳐 급속하게 유대와 갈릴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가정 교회를 포함하여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교회를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행 2:47; 9:31; 11:22, 26; 14:27). 신약에서 지역 교회의 자율성은 상호 의존이나 상호 연결성과 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바울의 선교 또한 놀랄 만큼의 상호 네트워킹을 포함하였다. 상호의존을 의미하는 또 다른 용어는 “공생”(symbiosis)인데, 서로 닮지 않은 유기체가 상호 이익 관계 속에서 친밀하게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크고 작은 교회들은 그들의 관계를 반드시 경쟁의 관계가 아닌 “공생”의 관계로 여겨야 한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작은 교회들은 크게 성장한 대교회로부터 무언가 배울 만한 점이 있다. 큰 교회들 또한 작은 교회와 상호 협력하는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작은 교회들을 단순히 성장에 실패한 교회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서로 연대하고 돕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2. 배가 번식 시스템으로서의 성장 (Growth as Multiplication System)

상호의존을 기초로 하면서 배가하여 번식하는 성장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잘 부합된다. 한 도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성장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필자가 영국에서 만난 바 있는 더그와 쥬디 홀(Doug and Judy Hall)은 교회성장을 고기잡는 일(fishing)에 비유하면서 경제적 모델(economic model)과 구속적 모델(redemptive model)을 연결시켜 설명한 적이 있다.

교회성장의 첫째 단계는, 고기를 먹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단계는, 고기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전도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 사회에서 직접 전도하는 일이다. 넷째 단계는, 낚시 사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다섯째 단계는, 낚시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 교회 상호간의 네트워크를 개척해 나가는 것(planting a network of churches)이다. 여섯째 단계는, 고기잡이 사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네트워크들이 도시마다 자라가게 하는 것이다. 교회들의 네트워크는 또 다른 교회들의 네트워크를 일으킬 수 있다. 일곱째 단계는, 고기잡이 사업간의 전체 시스템(total system)이다. 이것은 전도 및 사역의 네트워크가 도시로부터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의 방향 모델은 증식인데 이것은 기계적인 사고에서 유기적인 사고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릴 때 돌 위에 뿌리면 어떤 경우 처음엔 급속하게 자라지만 뿌리가 없어서 곧 시들고 만다. 어떤 교회들은 한 30년 동안은 급속하게 자란다. 그러나 그 교회가 계속 증식되어 자랄 수 있는가 아니면 한 세대를 지나 시들고 말 것인가? 단순히 자녀를 낳고 마는 일회적인 시스템 (delivery system)인가 아니면 계속적인 번식 양육의 시스템(multiplication system)인가? 효과적인 번식 양육의 시스템을 발전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복음에 뿌리박힌 신앙공동체를 향하여 (Toward a Community of Faith Rooted in the Gospel)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선교 운동을 할 수는 없다. 올란도 코스타스(Costas, 1982)는 오늘날 기독교 선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얕게 뿌리를 내린 무정형의 공동체”(an amorphous community)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 공동체에 “불신자들이 유입되고, 유기적인 생명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교회 사역을 하며, 주어진 사회 환경에서 성육신적인 하나님의 종이 되는 건강한 성장”(Costas, 1982: 86)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코스타스는 만약 교회가 그 소명에 충실하다면 “성문 밖으로”(outside the Gate)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법과 단순한 기독교 왕국의 모델(Christendom model)을 넘어서서 선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교회에 그리스도의 영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기독교 선교에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윤리를 체득한 영성을 가진 창조적인 소수(creative few)가 필요하다. 이러한 소수의 살아있는 영성은 반드시 누룩과 같이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교회의 세속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한국 교회 목회자나 평신도 가운데 어떤 가치관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는가?
  2.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라.
  3.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성도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지역 교회가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토의해 보라.
  4. 하나님 나라 성장에 기여하는 교회성장의 형태로 이 장에서 제시된 배가번식 시스템으로서의 성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단계와 전략을 생각해 보라.

2 Comments

  1. 생각해 볼 문제에 대한 개인적 생각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즉, “성공적인 삶”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현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에게 제1의 관심사는 아마도 “성공적인 목회를 통한 성도들간의 성공적인 삶의 영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성공적인 삶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성공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는 다르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이기네”라는 찬송의 구절이 있습니다.
    현시대는 믿음이 이기는 시대입니다. 믿음이 이기는 시대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악한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만이 이기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믿음의 힘을 인정하고 교묘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이러한 “자의적 믿음”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표지향적인 자의적인 믿음은 특히나 한국 사람들에게는 한다면 하는, 해내고야 마는 성격적인 사람의 기질이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적극적이고 사교적이며 성실한 사람은 어딜가나 인정받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따뜻한 말 할 줄 아는 사람들은 환대를 받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창의적 사고를 통한 생산적인 활동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성공합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의지적인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원하는 목표를 이뤄낼 줄 아는 사람들이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닌, 자의적 믿음에 대한 자발적 참여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줄 아는
    마인드 컨트롤을 할 줄 아는 똑똑한, 그러나 영악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을 전제로, 세상에서 전문적으로 다루어지는 것들을 강조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을 전제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성공신화를 이루도록 힘쓰기를 권면합니다.
    저는 우리시대의 교회가 빠지는 함정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핵심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핵심이 주제가 아니고 간단한 전제가 되어, 부가적인 정보전달에 연연해 하고 있다고 봅니다.
    십자가의 구원, 유월절 어린양 예수의 피, 죽었다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과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마음이 상한자가 고침을 받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는 갇힌 자가 놓임을 받는
    천국복음이 경시 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가축을 이용해 자기의 자산을 불립니다.
    서로다른 무늬의 나뭇가지들에 얼룩진 무늬를 내서 염소와 양들에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본 염소와 양들의 새끼들은 아롱지고 얼룩져져서 야곱의 소유가 됩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이렇듯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얼룩진 걸 바라보게 해서 사특하게 자기의 소유를 불리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이런 소유의 방법을 허락하셨다고 여기고 그 소유를 취하며 사는 것이 믿음의 소유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바라봄의 법칙은 야곱의 불어난 가축들 처럼 얼룩지기 십상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성도들에게 성공이라는 소유를 목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부흥을 빌미로
    얼룩진걸 바라보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 I just saw your comments…Reflection on the balance between upright theory and practice is critically important. May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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