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6] 하나님 나라와 선교 | 자연 환경을 보전하기

각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한 말씀이며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M. 엑발트, 독일철학자).

환경문제는 인간의 탐욕, 이기심 같은 죄성과 관련된 뿌리깊은 문제이다…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환경 보호 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양승훈, 1993: 33).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세계가 될 것인가? 모든 자연 만물은 아름답게 회복될 것이며 모든 피조물이 함께 사랑으로 거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는 우주적인 복음을 선포하면서 생태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샬롬이 모든 생태계에도 넘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21세기는 환경의 세기 (Ecology for the 21st Century)

20세기를 경제의 세기라고 한다면 21세기는 환경의 세기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거의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안기회, 1999: 1). 인류는 그 긴 역사를 통하여 이제 전환점의 비탈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인간은 공기나 물 그리고 천연 자원 등이 무한히 축적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산업과 과학의 발전은 문명의 발전과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지구가 병들어 신음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욕심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환경은 더 파괴되고 지구는 신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구촌에는 수자원이 부족하다. 물 소비량은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구별해준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하루 한 명당 쓰는 물의 양은 유럽 사람의 70분의 1, 미국사람의 15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북아프리카에서는 물이 부족해 한 사람 당 하루에 한 비눗곽 정도의 물밖에는 쓸 수 없다. 그런데도 물을 필요로 하는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거대한 해양은 지구 자정의 중추를 담당해 왔지만 이제 과대히 방출되는 생활수, 화학 폐기수, 농업 폐수 등은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다 (방지형, 1994: 37). 지구촌에서는 해마다 2억 5000만 명이 물 때문에 질병에 걸리는데 그 가운데서 천만 명이 죽는다.

에너지 고갈의 문제도 심각하다. 석유는 태양 에너지가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화석연료로서 매장량이 앞으로 50-60년 쓸 것밖에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한한 에너지인 석유를 난방, 발전, 차량운행, 생필품의 원료로 사용하면서 (풍요의 행진을 가속화시키며) 탕진해온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석유 부족에 따른 근시안적인 대책을 찾기 전에 근본적으로 소비를 줄이고 최소한의 자원으로 살 수 있는 사회구조와 삶의 양태를 이루어 가야 한다. 지구는 또 방사능 오염과 핵 공해, 폭발적 인구 증가와 무분별한 토지 사용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세계는 풍요를 누렸다는 순간부터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산성비, 적조현상, 산림황폐, 이상기후 변화 등으로 환경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칼빈 데위트(Calvin Dewitt, 1991)는 환경문제를 지구 기능의 저하로 이해한다. 해마다 열대 삼림이 2500만 에이커가 벌채된다(이는 남한의 면적에 가깝다). 약 1억 종의 생물 종 중에 98%는 이미 멸종하였고 현재 2%인 200만종 중에서 날마다 3가지 생물 종이 멸종한다. 비료 사용이나 각종 재해로 지력이 황폐해지고 있다. 수많은 쓰레기 및 인간이 발명한 70만종의 화학약품은 순환적인 생태 시스템을 위협하고 있다.

오염된 공기도 자연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대기의 오염은 대기권의 오존층을 파괴함으로써 피부암 등의 질병을 일으키며 산성비를 내리게 하여 농작물과 수목을 훼손시킨다. 또 대기의 오염은 물을 산성화시킨다. 산성화된 물을 마신 모든 생물들의 신체는 산성화되어 저항력이 약화되고, 산성비는 토양의 생산력을 약화시킨다. 공기의 오염은 호흡기 질병, 기관지염, 폐암, 각종 안질의 발생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는 자연이 타락한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음의 시는 환경파괴의 아픔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뿌리째 뽑혀진 수림의 아픔

오염된 바다의 울부짖음

말라버린 지 오래된 하천들

기름 찌꺼기로 뒤덮인

황폐한 해변과 그 신음 소리

그 속에서 함께 괴로워하시는

당신을 느끼게 해주소서


죽어 가는 자연과 함께

우리도 죽어 가고 있음을

자연과 인간은

나누일 수 없는 하나의 생명임을

모든 이가 깨닫게 하소서

인간은 파괴된 자연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1992년에 지나간 천년을 정리하고 새로운 천년을 내다보면서 IBM과 미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난 1천년 동안 인류의 역사를 바꾼 주인공 10걸을 뽑은 적이 있다. 그 중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 창설자인 아사지의 성 프란체스코가 1위를 차지하였다. 인간과 자연의 평등 사상은 인간의 자연정복사상을 기초로 한 중세 기독교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 프란체스코가 중세에 이미 해와 달, 바위와 흙, 나무와 새 등은 인간과 형제 자매라고 외친 것은 21세기에서도 생태 패러다임의 중심사상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1970)도 프란체스코를 “생태학자들의 수호 성인”(patron saint of ecologists)라고 부른 바 있다.

미래학자 톰 사인은 21세기에 그리스도인이 직면해야 할 최대의 문제가 바로 환경문제라고 말하였다. 침례교 세계 연맹(Baptist World Alliance, BWA)의 덴튼 로츠 박사도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자연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시대적 소명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오염된 물과 공기, 음식 때문에 인간의 건강과 인류의 미래는 크게 위협받고 있다. 과연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을 돌보는 것도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이해할 수 있는가?

기독교 선교의 생태학 (The Ecology of Christian Mission)

서구 사회의 자연 정복 및 남용은 종종 왜곡된 성경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성경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자연과 그 가운데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이다. 기독교는 자연을 존중하지만 단순한 자연 종교(nature religion)는 아니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시 89:11). 인간은 자연의 주인(owner)이 아니라 자연의 청지기(steward)이다. 자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영원한 힘이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받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창조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힘과 지혜, 영광과 위엄을 보게 한다(시 104:24).

환경보호는 피조세계를 잘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과 연관되어 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창 1: 28)는 말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땅을 마음대로 파헤치고 이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경작하고 지키는 것”(창 2:15)이라는 의미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경작한다’는 말의 어근은 ‘섬긴다’는 의미이고 ‘지킨다’는 말의 어근은 “보존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개념들은 착취와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땅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 모든 생명의 단지 한 부분이라는 범신론적인 믿음(pantheistic belief)이나, 살아있는 모든 생물의 동일한 가치를 신봉하는 전체주의적 관점(holistic view)과는 다르다 (Kirk, 1999: 177). 그것은 청지기적인 책임을 나타낸다.

세상에 거주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며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는 ‘생태학’(ecology)은 물질적인 자원의 경영을 의미하는 ‘경제학’(economics)과 같은 어근을 갖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성(modernity)의 영향을 받아 지식과 정복은 지혜와 돌봄을 대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탈의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즉 소작인이 주인이 되기를 요구한 것이다. 모든 타락은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려는 교만과 우상숭배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천연자원들을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마음대로 파헤쳤고, 과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들(예, 태아 연구, 동물 실험, 유전자 변형 등)을 실험하였고, 인간 자신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God)와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freedom before God)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에도 필요하다. 장신대 노영상 교수는 이사야가 구원의 세 가지 차원에 대해 언급하였다고 지적한다(사 35:1-10).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 약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이 힘을 얻고 자유롭게 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는 것의 세 가지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종교적인 구원, 사회정의 실현으로서의 사회적 구원, 메마른 땅에서 샘이 터지는 것으로서의 자연적 구원의 세 가지 차원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전지구적인 총체적 샬롬을 지향한다(사 65장).

안식일은 생태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안식일의 휴식은 인간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자연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안식일 계명은 남종과 여종, 가축이나 집안에 머무는 식객에게도 해당된다(출 20: 8-11). 그것은 노동으로 지친 인간을 회복시키는 “치료적인 의미”뿐 아니라 인간에 의해 가공되는 자연을 회복시키는 “생태학적 의미”를 가진다. 안식일의 정신은 안식년과 희년으로 확대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년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대하 36:20-21). 인간은 땅 위에 살다가 땅을 떠나가는 “나그네”요 ”청지기”이기 때문에 인간과 땅, 인간과 자연의 정의로운 관계는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생태계의 구원자”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치유와 생명을 주는 사역을 하셨다. 폭풍을 잠잠케 하신 사건에서, 그는 적대적인 자연 위에 뛰어난 그의 능력을 보이셨다. 군중을 먹이신 사건에서는 부족함을 뛰어넘는 그분의 능력을 보여 주셨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져진 삶의 부요함을 깨우쳐주셨다. 또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생명의 주권자이심을 보여주셨다. 구원의 완성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현재 피조물도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다고 말하고 있다(롬 8:21-22). 오늘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세상의 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자연과 환경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 자기가 산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축복이 달려있다고 믿고 살기 때문에 사람과 자연을 축복하고 섬기려고 한다. 자연도 하나님 나라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생태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가 강조해 온 것처럼 앞으로 21세기 신학의 중심은 생태학이 되어야 한다. 선교적 성찰의 문제에서 생태학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 크리스천들은 선교의 상황으로 환경의 부패, 전염병, 마약 등과 같이 통제하기 힘들어 보이는 지구촌의 변화들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창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순절 선교학자인 그란트 맥클렁(L. Grant McClung, 1999)이 미래를 위한 오순절적 선교의 패러다임으로 말씀과 성령에 근거를 두면서 전도(evangelism)와 에큐메니즘(ecumenism), 종말론(eschatology)과 함께 생태학(ecology)을 포함할 것을 제안한 것은 흥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매우 전인적인 것이다.

녹색 교회공동체를 만드는 과업들 (Tasks for the Green Church Community)

유럽의 환경 운동단체인 그린피스는 “지구 위에 남은 마지막 나무에서 마지막 잎이 떨어질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돈을 먹고 살수 없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다소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환경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한 말이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교회는 환경 문제도 선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복음 전도자이면서 기독교 사회학자인 토니 컴폴로 박사는 새천년의 그리스도인의 상을 말하면서 녹색 크리스천(Green Christian)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녹색 크리스천은 환경을 보호할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환경 공동체인 녹색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교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1. 자족의 가치관을 가지라

현재 지구의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정화 능력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인간은 더 많이 소유하기 원하고 더 많이 편해지기 원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하지 않으면 환경 문제의 해결은 어렵다. 큰 것, 많은 것, 편리한 것, 화려한 것은 좋은 것이라는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 환경 파괴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그 원인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마다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보호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교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는 성경의 가치관을 성도들에게 내면화해야 한다. 의식주를 단순화해야 에너지 문제도 해결해 갈 수 있다. 자족(self-content)의 마음은 선교적인 마음이다.

2. 하나님의 마음을 선포하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명령은 사람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었다. 사람은 물론 육축까지 쉬게 함으로 창조세계 내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안식년 및 희년 제도는 토지의 생명력 뿐 아니라 육축과 야생동물까지 배려하신 것이다(레 25:3-6). 환경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선포(kerygma)도 교회의 사명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는 교회의 사명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피조물을 생각하게 하는 설교를 한다. 둘째, 예배당의 화려한 장식을 피한다(꽃꽂이 대신 화분을). 셋째, 교회력을 창조보전의 의미를 살려 지킨다(예, 창조주일, 추수감사주일). 넷째, 환경주일(6월 첫 주일)을 정하여 지킨다. 다섯째, 전도 활동시 환경캠페인을 겸한다(환경전도지 활용). 여섯째, 자연예배를 드린다. 일곱째, 대예배 기도할 때 이웃과 자연을 위해 기도한다. 인간은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3. 녹색 교인(Green Christian)으로 양육하라

교회는 항상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을 갖도록 교인들을 교육해야 한다(방지형, 1997: 200). 환경보호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본 윤리와 관계된 문제임을 알려야 한다(양승훈, 1993: 74).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관계가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임을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나 교회의 모든 모임 등에서 환경교육을 실시하거나 환경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 학교에서도 간식은 인스턴트식품이 아닌 우리 농산물로 된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 또 일회용품과 합성세제 안쓰기, 장바구니 보급, 재생화장지 쓰기 등 가정에서의 실천을 교육한다. 크리스천이 본을 보여 쓰레기를 덜 방출하고 검소한 식생활을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한국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2001년 한 해에만 15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빈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이 때에 수많은 음식물을 낭비하는 것은 비기독교적인 윤리이다 (조용훈, 1997: 58). 또 교인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는 걸어다니고 물도 아껴서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작은 일부터 환경을 아끼는 삶을 살도록 교인들을 지도해야 한다.

4. 기독교적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라

환경 운동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Schaeffer, 1970). 뉴 에이지 운동은 자연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환경운동을 한다(이동원, 2000: 273). 자연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돌봄의 대상이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교회나 시민단체가 환경 운동을 하는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 환경을 살리는 데 교회 예산도 사용하고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환경프로그램도 실시할 수 있다. 또 지역사회와 교회들 간에 환경보전을 위해 연대할 수 있다.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체를 신고하는 정신도 가져야 한다. 교회는 경제론자들의 주장보다도 환경론자들의 주장을 주의깊게 귀기울여 들어보아야 한다.

빌려온 미래를 갚는 교회 (Church that Repays the Borrowed Future)

하나님의 나라는 오염이 없는 아름다운 자연 세계, 모든 생물이 함께 거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구약 성경은 그 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 꿈은 현실을 외면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교란 현재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우리는 자녀들로부터 미래를 빌려왔다”(We have borrowed the present from our children)라는 말이 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에게 현재를 빌려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현재를 그들에게 다시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자연과 자원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공동의 자산이다. 미래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죽음의 가능성이 높아지며 자연 세계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그러한 세계를 물려준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의 자녀를 낳는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피조물의 신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녹색교회, 녹색 크리스천, 녹색 세계를 바라보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꿈을 꾸어야 한다. 몰트만은 생물들이 서로 함께 어울러서 살아가는 지구를 “피조물 공동체”(community of creation)라고 불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그리스도인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 19-23).

바울은 우리의 몸이 죽은 상태에서 일어나게 될 때 자연도 함께 구속을 받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지구의 선한 청지기로서 봉사해야 한다. 녹색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인간이 자연의 청지기(steward)가 아니라 주인(owner)이 되는 사례에 대해 발표해 보라.
  2.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다음과 같은 소동을 벌였다. 배에는 많은 승객들이 있었는데 그는 독불장군처럼 행동했다. 어느날 밤에 그는 송곳으로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당신 미쳤어요?”라고 승객들이 소리치자 그는 조용히 그들에게 대답했다. “당신들에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요. 나는 지금 내 자리 밑에다가 구멍을 뚫고 있지 않소?””  이 이야기가 환경보존과 관련하여 시사해 주는 바는 무엇인가?
  3. 한국 사회에서의 환경 파괴의 사례들을 조사해 보라.
  4. 교회가 성도들을 그린 크리스천(Green Christian)으로 양육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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