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5] 하나님 나라와 선교 |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부의 축적을 촉진하거나 옹호하는 개인들이나 사회에 대하여 명백히 반대한다. 복음은 자기들 개인의 이기적 이득을 위하여 사회를 조작하는 사람을 책망한다. 복음은 자기들 자신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전쟁 물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 (유고 조릴라, 1990: 59).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는 정의의 복음을 선포하고 정의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공의를 강물같이 사회에 흐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난과 억압의 구조적 문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불평등과 억압, 그리고 가난과 착취의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구상에는 가난의 문제가 심각하다. 무한한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수백만이 매일, 기아와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10억 이상의 사람들이 매일 저녁 굶주린 채, 불충분한 영양상태에서 잠을 잔다. 12억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UN은 13억 3천만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마실 물이 없고 22억 5천만은 하수구 설비가 되어있지 않은 곳에 산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은 특별히 어린이들을 어렵게 한다. 그들은 병에 걸리기 쉽고 육체, 정신적 성장에 저해를 입고 종종 일찍 죽기도 한다. 필자는 일전에 국제적인 어린이 구제 사역 기구인 Compassion International (www.compassion.org)의 지도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가난과 핍박문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3억의 어린이들이 고아이거나 집이 없다. 3억 6천만명의 어린이들이 문맹이며 2억 5천만명의 어린이들이 일을 하고 있다. 약 5백만명의 어린이들이 주로 모계유전 에이즈 병을 앓고 있다. 80퍼센트의 어린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그 복음에 반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매일 3만 4천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간다. 만약 가난한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을 지나 살아남는다면 생활의 비참함에서 벗어나고자 매춘 혹은 어렵고 단순한 노동을 해야만 한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빈부격차의 구조를 심화시키고 있다. 가난의 문제는 단순히 돈이 부족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문제이지만 정치적 불의나 독재 체제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1983년 복음주의자들의 휘튼 대회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가난은 필요악이 아니며 종종 불의, 착취, 압제로 특징짓는 사회, 경제, 정치, 종교 제도에서 비롯된다. 지구상의 빈민의 곤궁은 종종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로 인해 지속되고 있다. 악은 인간의 마음 속 뿐 아니라 사회 구조에도 존재한다…. 현대 세계에 있어 불의 문제는 이미 전 세계적인 영역에 해당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이들에게 이러한 상황을 신중히 연구하도록 호소한다. “의인은 가난한 자를 위한 공의에 마음을 쓰나 사악한 이는 그러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잠 29:7).

독재로 인한 억압적 정치 구조는 사회 정의의 실현을 저해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완벽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시장의 불공평은 사회 복지를 위한 공의 정치에 의해 제어될 수 있다. 정치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제어받지 못하는 정치는 기득권의 전유물이 될 때 위기의 정치가 된다. 교회가 만약 정의롭지 못한 정치 구조 속에서 전혀 영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는 불의한 정치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대안이다. 사무엘 헌팅톤(Samuel Huntington)은 1970년대 이후 동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정부들이 출현한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의 “제 3의 물결”이라고 명명하였다. 미국의 어느 석학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전으로 민주주의의 발흥을 꼽았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 가운데 인간의 삶의 질(자유, 평등, 인권 등)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정치 사회 제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내적으로 신본주의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지만 사회 안에서는 민주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가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영적인 세계는 거룩하고 세속 세계는 속되다는 이원론적인 사고와 정교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정치 경제적 사회 정의는 사람들의 삶에 놀랍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과연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은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의 문제, 불의의 문제와 무관한 것인가? 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은 정의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비전이다. 경제나 정치의 사회 정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의 중요한 이슈이다.

정의의 복음

구약 성경에는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공의를 사랑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미 6:8).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정의 중의 하나는 “가난한 자의 권리가 회복되는 것”(렘 5:28-29)이다 (박득훈, 2001: 24-26). 시편 72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고 ……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여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1-4절)

고든 피(Gordon Fee)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미래의 통치를 현재에 가져다주신다고 말한다(1991: 16). 채수일 교수(1993)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 등을 이유로 경제 정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중심 문제라고 주장한다. 성서에 이자놀이에 대한 금지(레 25: 35-38), 저당잡은 외투를 밤이 되면 되돌려 주라는 이스라엘의 법 정신(레 17-26장),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 대한 관심, 빚진 노예의 해방과 일반적인 부채의 탕감에 대한 규정(신15:1 이하) 등은 이에 대한 좋은 예로 등장한다. 성경에서 십일조의 목적은 레위인들을 위할 뿐만 아니라 나그네와 과부, 고아를 먹이는데 쓰기 위함이고, 이삭 남기기 제도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려깊은 배려이다.

정치 경제적 불의에 대한 대표적인 하나님의 법은 안식년과 희년이다(레 25: 2-7; 신 15: 1-2; 신 15: 9-10). ‘희년’이라는 단어 yobel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으로는 aphesis)의 의미는 ‘풀어주다’ 이다(출 21:2-~6;23:10-~11; 신 15:1-~18; 렘 34:8-~22). 따라서 어떤 의미로 정의는, 자유와 해방에 대한 다른 말이다. 희년이 되면 종은 누구나 자유인이 되어 친족에게로 돌아가게 되며 잃었던 땅을 되돌려 받게 된다. 선지자 미가의 예언 선포에는 희년법의 정신이 깔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미가는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이 남의 재산을 빼앗고 종으로 부려먹는 것에 대해서 질책하고 있다(미 2:1-2). 이스라엘은 희년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법을 다시 선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교의 목적을 나타내기 위해 은유적 언어로서 희년을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공동체는 매 49년마다 한번이 아닌, 날마다 이뤄지는 ‘희년 공동체’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이며 그것은 가난한 자와 눌린 자와 눈먼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 18-19).

예수 그리스도는 정의로운 관계로 지배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정의를 관계로 규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어떤 요소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 때문에 의로운 것이다. 정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기초하며 타인, 특히 가난한 사람들, 약자들,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유고 조릴라, 1990: 40). 하나님께서는 동료 인간과의 정의롭지 못한 관계가 있을 때는 희생의 제물의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희년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더 나아가서 희년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정의로운 세계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정의는 그 관계적인 성격 때문에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복음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복음을 인간의 내면적인 것에만 국한시킨다면 이웃이나 사회와는 별 관련이 없는 이기적인 신앙이 될 것이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들의 손에 죽어가고 있는 오늘날 “복음화한다”(evangelize)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고 조릴라, 1990: 55) 매일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빈곤한 나라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오늘날 복음은 어떤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가?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종족을 침략하고 사람들을 압제하는 기독교인 독재자들은 어떤 종류의 복음을 믿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신학적 설명을 시도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각처로 다니시면서 가르치고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보여주려고 애쓰셨다. 주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인간은 공동체에서 삶을 영유하는 방법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닌다. 가난한 자와 착취당하는 자를 위한 정의는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할 윤리적 결정의 문제이다 (Kirk, 1999). 경제나 정치는 인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인류가 경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주님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시다.

사회정의를 위한 교회의 과업

1. 도덕적 권위를 유지하라

교회는 가난과 억압의 불의 가운데 우월한 도덕성을 유지하며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사회 정치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교회의 행태적인 힘은 바로 교회의 우월한 도덕적 권위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교회의 공신력과 신뢰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김녕, 1996). 교회는 사회에 대해 예언자적 직능을 갖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의 양심을 살게 하고 윤리적 분별력을 분명히 하여 도적적 용기와 힘을 강하게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사회의 교사가 되어 사회의 부정의를 알려 주고 소외된 자들의 소리를 듣고 미래를 형성할 도덕적 교육을 시행할 직능을 갖는다. 교회는 더 우월한 사회 윤리의 표준을 갖고 그것을 사회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사회의 양심을 살게 해야 한다(김철영, 2000: 107).

교회가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나 영원한 진리를 전파할 때 교회는 사회 개개인들이 지닌 양심(선악 분별)을 움직인다. 교회가 진리를 말할 때 다수가 지니고 있을 양심 속에서 동의를 추구하고 찾아낸다. 교회가 사회 안에서 도덕적 공감대를 발견하거나 창출할 수 있다면 분명 교회의 신뢰성은 확고해질 것이다. 교회 자체가 높은 도덕성으로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지 않고는 사회를 향하여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교회가 윤리적인 표준을 더 높이 유지하며 사회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2.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하라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독재 체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아직도 전 세계에 비민주적인 국가들이 70여 개가 되고, 세계 인구의 약 40%만이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고 있다. 한국 사회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민주주의로의 전이(democratic transition)가 시작되었다. 90년대 들어와서 군부 잔재의 청산, 지방자치제, 경제 정의, 선거문화 등 여러 가지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발전되었지만 여전히 지역 감정의 문제, 정당의 민주화, 인권의 문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차별의 문제 등 갖가지 문제들이 남아있다. 민주주의가 도입된 사회에도 여전히 공고화(consolidation)의 과제가 남아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교회는 먼저 민주화되어야 하고 기독교적 시민운동의 발전과 정치 영역의 선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시민운동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율적, 사적, 비영리 조직이다 (Tujil, 1999: 405). 비영리 비권력 단체라는 사실이 시민운동으로 하여금 도덕적 권위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시민 다수의 도덕적 지지를 이용하여 법적 정치적 세력을 견제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법률을 제정하는 데 영향을 미쳐야 하고 그 법이 집행되는 것을 감시함으로써 새로운 관습과 제도를 창조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김철영, 2000: 106). 기독교가 현대인의 일상 생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는 시민운동이라 할 수 있다(손봉호, 2000). 스스로 이익을 누리지 않으면서 약자와 공익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바치는 시민운동은 그 자체로 사랑의 표현이거니와 동시에 그것은 장기적으로 전도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또한 사회 정의를 위해 정치 영역의 변혁을 지향해야 한다. 다니엘이나 느헤미야는 정치가로서 당대에 영적 변혁을 주도하였다. 한국의 경우도 현 16대 국회의원의 65%가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사회에는 기독교적 정치의 모델링이 존재하는가? 교회는 사람들의 삶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 문화의 변혁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이 정의의 복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민주주의 자체가 교회의 목적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복음 전도의 중요한 토양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정의와 평화, 인권과 화합을 위해 일하는 기독교인들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라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이 변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교회의 총체적 선교를 위한 중요한 매개 목표(intermediary goal)가 될 수 있다.

3.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라

사회의 민주화가 발전해 간다면 교회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사회가 안정되어 갈수록 교회는 보수적인 역할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한 답변은 교회는 항상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the voice of the voiceless)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불이익, 병자들, 장애인들, 압박받는 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교회는 언제나 인간의 존엄성, 권리,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시민적 정의와 같은 보편적 관심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예언자적 도덕적 역할은 약화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 착취당하는 자를 위한 정의는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할 윤리적 결정의 문제이다 (Kirk, 1999). 세계 곳곳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성원들 대부분은 가난하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 안에 있거나, 교회 자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상황 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먼저 이 세상에서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가난하고 억압을 받는 자의 편에 서야 한다. 복음서는 마지막 심판시에 예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마 25: 31-46).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즉 “작은 자들”과 동일시하고 계시다. 이들은 굶주린 사람들이요, 목마른 사람들이요, 병든 사람들이요, 옥에 갇힌 자들이다. 마지막 심판 시의 물음은 “정의를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일 것이다. 복음의 선포 속에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정(self-denial)의 필요를 내포한다(마 16: 24-27). 크리스천은 고난받는 제자가 되어야 하며 날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

만약 물질적 부를 복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과 손을 잡는다면 역사의 진로(historical course of action)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기독교적 소규모 대부금 사역은 놀라운 열매를 거두고 있다. 75달러, 200달러, 500달러 등의 대부금은 가난한 공동체들을 변화시킨다. 필자가 알고 있는 데이빗 부소(David Bussau, Opportunity International의 국제총재)는 호주의 사업가인데 지난 수년간 5,000만불을 대여해 주어 275,000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수십만 가족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대부금은 가난한 자들의 자립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수입의 1%만 소규모 대부금으로 기여하면 가난한 10억의 삶을 50% 개선시키는 데 단 1년이면 된다고 한다.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소규모 대부금 뿐 아니라 효과적 공동체를 개발하고 해비타트 운동처럼 적절한 가격의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4. 사회정치 참여의 신학을 발전시키라

한국 교회의 정치 의식은 아직도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cf. 백종국, 1994). 이것은 사회 정의를 위한 교회의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전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교회의 경우에 더욱 신학적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아직도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민주주의가 왜 중요한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사회 정의에 참여할 수 있는지 분명한 그림을 갖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정치 신학이 없이 정치에 참여할 때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날 수 있다. 필자의 친우(親友)인 폴 프레스톤(Paul Freston, 2001)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복음주의자들과 정치>(Evangelicals and Politics in Asia, Africa, and Latin America)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흔히 저지르기 쉬운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조합주의(corporatism)이다. 이것은 정치 참여가 본질적으로 교회의 기관과 지도자들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정치를 종교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 교회들에서 이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둘째는, 승리주의(triumphalism)이다. 이것은 종교를 정치를 위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발전에 더 문제가 된다. 많은 아프리카 독재 국가들에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은 기존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이나 해방신학 같은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복음주의적인 정치 신학을 새롭게 형성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사회 정치적 변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성령의 변혁적인 생명

성령 안에서의 생명은 교회로 하여금 복음 전도와 사회에서의 정의를 위해 일하도록 힘을 부여해 준다. “변화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에 의해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에 비추어 이 세상을 변혁시키도록 요구받는다”(Karkkainen, 2001: 424). 사회 정의를 위한 절대적 규범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왕의 주재권은 악의 세력에 대한 궁극적 승리의 보장이다. 교회는 그 사역의 기준을 하늘로부터 받았다. 사회 참여는 단지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성찰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영성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Karkkainen, 2001: 425). 성령에 의해 변화받은 사람들은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성령과 동역한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매일의 기도 생활도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주님과 동역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정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하나님께서는 왜 50년마다 땅을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희년제도(Jubilee)를 설정하셨는가? 그 원리를 오늘날 어떻게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
  2.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데 당신이 참여할 수 있는 그룹 이나 제 3세계 국가를 생각해 보라.
  3.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는 어떻게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는가?
  4.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교회의 역할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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