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4] 하나님 나라와 선교 | 샬롬의 세계를 건설하기

그리스도가 선포하셨던 복음은 평화였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7). 소아시아에서 헬라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의 분열의 장벽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엡 2:14)이시다. 민일 우리의 영이 진리와 의로움과 믿음의 갑주를 입게 된다면, 이 ‘평화의 복음’은 우리가 이 세상의 어두움의 평화 없는 권세들에 대한 힘든 싸움을 지속하고 견딜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제임스 윌, 1999: 111).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전쟁이나 갈등이 부재한 평화의 세계가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는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평화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교회는 평화의 복음을 말로 선포하며 행동으로 구체화하여야 한다.

폭력, 갈등, 핍박의 삼위일체 시대

지구상에는 끊임없이 폭력과 갈등과 핍박의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특별히 현대 문화는 죽임의 문화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폭력과 죽임이 광범위하게 일상화되어 있는데다가 조직적으로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채수일, 1998: 225). 전쟁은 죽임의 문화의 절정을 이룬다. 1992년에만 지구상에 29건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숨진 사람이 600만명이었다.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들의 인종, 민족간 권력 다툼은 심각한 상태이며 그들 국가의 무기 수입 비용이면 가난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정도이다. 아프리카의 르완다는 20세기에 기독교 복음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나라였다. 정부의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 등도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종족 간 전쟁으로 90년대 이후 200만명 가까이 학살되는 참극이 발행하였다. 민간인 대학살은 르완다의 기독교 복음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필자의 친구 중에 사무엘이라는 르완다 목사가 있는데 그는 르완다 국민들이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평화의 복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현재 지구상에 종교 간 갈등과 핍박의 문제도 심각하다. 특별히 지난 5년 간 종교 핍박의 문제는 더욱 증폭되어 왔다. 종교 핍박이란 어느 강한 힘을 가진 집단이나 정부가 다른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상태로 억압하고 핍박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 핍박의 문제는 특별히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더욱 심각해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갈등과 전쟁에 있어서 종교적인 요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Marshall, 200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투쟁은 1960-70년대 보다 더 강화되고 있다. 카쉬미르,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종교로 인한 갈등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종교 핍박의 문제는 모든 종교 집단에게 영향을 미친다. 수단의 기독교인들, 티벳의 불교인들, 중국의 파룬공 등 다양한 집단이 핍박을 받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핍박을 받는 편이다. 비정교회 기독교인들(non-Orthodox Christians)도 러시아, 그리스, 아르메니아 등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종교적 자유가 가장 보장된 나라들은 미국, 핀란드, 네델란드, 노르웨이 등을 들 수 있고 종교적 억압이 가장 심한 나라들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미얀마, 북한, 티벳, 중국, 베트남, 파키스탄, 쿠바 등이다. 종교적 핍박의 경향을 연구해 온 폴 마샬은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을 내린다(Marshall, 2001). 첫째, 앞으로 종교적 핍박은 더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그러나 종교적 핍박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셋째, 정치적인 충돌과 갈등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이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왔다. 오늘날과 같은 전쟁과 핍박의 시대에 기독교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하다. 종교 간 갈등과 핍박이 일어날 때 교회는 사회에서 힘이 있는 지배적인 종교가 소수 종교인들을 억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정치적 틀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비전을 둔 평화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화해와 평화의 복음

평화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한 샬롬의 비전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샬롬은 온전함, 치유, 정의, 평등, 연합, 자유, 그리고 공동체 등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폰 라드(G. Von Rad)는 샬롬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질서정연하게 하는 공동의 안녕”으로 정의하였다. 평화는 부정적 평화와 긍정적 평화로 구분되는데, 부정적 평화는 정치와 법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평화의 개념으로 전쟁이 부재한 상태, 국가간의 계약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긍정적 평화는 전쟁의 부재라는 소극적 의미보다 총체적 구원의 상태(Shalom)와 같은 종교적 함축성을 갖는다 (김형민, 2001: 212). 성경에서 샬롬이란 사회 경제적 복지와 안전,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온전함을 의미한다. 인간 세계가 겪는 혼란은 샬롬 부재의 결과이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평화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간의 올바르고 의로운 관계가 유지됨으로 향유된다. 평화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통한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또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셨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도성에 다가가면서 그 도성의 수많은 불의와 부패, 폭력, 그리고 권력의 경쟁을 보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눅 19:42).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고(요 14:27),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에 대해 말하면서 그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회복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엡 2:14). 평화의 복음은 화해에 기초하며 그것은 수직적이면서 동시에 수평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평화를 창출하는 자(peacemaker)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나간 교회사는 교회가 평화보다는 분쟁과 전쟁에 휘말려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역사를 통해 전쟁과 정의로운 평화라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입장을 견지해 왔다.

전쟁에 대한 교회의 태도

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대표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성전론(holy war theory)이다. 이것은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십자군 전쟁(11세기-13세기)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성전론은 적이 거대한 악의 표본일 때 하나님은 그 전쟁을 재가한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개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정복이야기들, 특별히 적의 모든 사람들과 재산을 완전히 파괴하도록 요구하는 이야기들 속에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성전론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사용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둘째는, 평화주의(pacifism)이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을 하거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평화주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영국 퀘이커 교도들이 대표적인 평화주의 그룹이다. 평화주의는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생명을 빼앗는 것에 반대하고 그리스도인들의 군복무와 참전을 강력히 거부한다.

셋째는,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이다. 이 관점은 어거스틴이 주장한 것으로 기독교회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이것은 사회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악의 세력을 징벌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원인과 의도, 그리고 조심스러운 수단과 승리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사실 이 교리는 전쟁을 정당화하기보다는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 대한 비평도 있다(Kirk, 1999: 151-152): 전쟁이 정당하다는 기준이 얼마나 정확할 수 있는가? 국제 정치는 항상 이기주의적이다. 또 무고한 시민의 살상은 피할 수 없다. 정의를 외치는 전쟁으로 폭력이 더 악화되어 갈 수도 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인정한다면 전쟁의 회오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전쟁에 대한 특정한 관점의 표명보다는 교회는 좀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폭력과 갈등의 문제를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폭력을 극복하고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평화 증진을 위한 노력

1. 하나님의 집 내부를 정돈하라

교회는 먼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즉 갈등 해결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내부적인 구조에 있어서 개방적인 토의와 격려를 허용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교회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교육해야 한다(조셉 알렌, 1993: 110, 120). 또 화해, 평화 등의 메시지를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 선포할 필요가 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인식과 양심의 개선에 기인하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들을 재교육하는데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율리치 모서, 2001: 240). 무엇보다 교회는 스스로 내적 갈등과 다툼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교회 스스로가 공동체적인 삶과 화해의 모습을 보일 때 국가 간 그리고 사회 안의 평화를 보유하고 지키는 데 그 신실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볼프강 후버, 1991: 138).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적, 인종적, 공동체적 투쟁에 의해 야기되는 갈등에 당파적으로 참여해서는 안될 것이다.

2. 폭력의 원인을 이해하라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갈등과 폭력의 넓이나 깊이에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한다. 폭력은 인간의 내적 질병이나 부조화, 그리고 이기주의와 권력의 추구 등으로 발생하게 된다(Kirk, 1999: 157). 삶의 자기중심적인 관점은 대개 폭력으로 이끌게 된다. 폭력은 자기 발생적(self-engendering)이다. 즉 많은 폭력은 폭력으로 고통받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지역적, 국가적 차원에서도 사실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갈등의 뿌리인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해서도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폭력에 대한 성찰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더 깊은 자각을 준다.

3. 비폭력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라

교회는 서로 대립하는 집단에게 폭력은 대립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악화시킬 뿐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또 갈등 집단 사이에 공평하고 공정한 중재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전쟁 시에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아야 하며 전쟁 후에도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는 전쟁이 끝났을 때가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 해결될 때 도래하기 때문이다. 시민 사회에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전쟁 후 피해 보상, 무장 해제, 농업과 산업의 재건, 난민들의 귀환, 전범의 처리, 민주주의의 대표자 선거, 그리고 전쟁에 대한 개요 등의 여러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Kirk, 1999: 159). 90년대 중반에 남아프리카, 칠레, 르완다 등의 나라들에서 광범위한 인권유린의 사건이 있는 후에, <진리와 화해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 위원회의 목적은 과거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국가가 새롭게 출발하기 위한 빛을 비추는 일이다. 비폭력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십자가의 정신으로 무장된 평화를 위한 연합체를 구성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비폭력의 문화 창출은 교회의 선교와 무관하지 않다.

4. 평화의 신학을 발전시키라

신학은 선교사역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일 대학의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1996)가 쓴 <Exclusion and Embrace>라는 책은 평화의 신학의 발전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볼프는 만약 화해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타인을 미워하는 것을 다루는 방법들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볼프는 근대 사회에서 배타성(exclusion)이 점점 중요한 죄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라는 동심원에 들지 않는 자들을 거부하고 미워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평화 공동체를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볼프는 포용(embrace)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제시한다.

포용의 신학적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자신을 주는 상호적 사랑, 그리고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있다. 십자가는 부정의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포용을 보여준다. 포용의 신학은 인간의 폭력보다는 하나님의 폭력, 즉 하나님의 정의를 기대하는 사랑의 신학이다.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검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볼프에 의하면 폭력의 세계에서 교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에 놓여있다. 하나님의 폭력을 추구하는가? 인간의 폭력을 추구하는가? 인간 폭력을 사용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포용을 거부하는 것이다. 평화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온다. 평화에 대한 신학적 작업도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시켜야 할 선교적 영역이다.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

교회의 평화 창조 노력의 전망은 어떠할 것인가? 교회의 노력은 한스 엔젠버거(Hans Enzenberger)가 말한 것처럼, 시시푸스(Sisyphus)의 돌이 될 수도 있다. 희랍 신화에서 신의 진노를 산 시시푸스는 돌을 언덕 위로 올려다 놓고 나서 또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을 계속 올려놓아야 하는 징벌을 받는다. 어떻게 보면 평화의 노력이 이 폭력의 시대에 무의미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를 이끄는 힘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바로 평화의 세계이다(사 11:1-9). 전쟁과 폭력은 인간의 절대적 운명이 아니다. 비록 언덕 위로 올려놓은 평화의 돌이 다시 떨어진다 하더라도 교회는 평화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희망의 권리”가 있다(2000: 197-206). 교회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한다. 구약 성경만큼 희망을 향한 투쟁을 강력하게 표현한 책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절한 격동의 역사 가운데서 계속 희망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리스도인들도 종말을 기다리는 법을 배워왔다. 평화 증진의 노력은 비록 그 과정이 힘들더라도 교회 선교의 지속적인 초점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십자가 대신 창을 들기로 유혹을 받을 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영적인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몰트만(J. Moltmann)이 말한 것처럼 “평화는 역사 안에서 상태가 아닌 과정이며 자기만의 소유가 아니라 함께 가는 길이다”(김형민, 2001: 213, 재인용). 교회는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된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에 속한 자들이며(롬 8:5), 생명과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증오감, 상해, 전쟁, 폭력 등은 결국 원수까지 포용하는 위대한 사랑에 의하여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율리치 모서, 2001: 236). 평강의 하나님은 속히 사단을 우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실 것이다(롬 16:20). 평강은 하나님의 결정적 승리를 집약해주는 개념이다. 평화는 단순히 강대국의 조정이나 정부의 군사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때 가능하다. 평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야기하는 행동에 대해서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관점에 대해 토의해 보시오.
  2.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나 가족 내에서의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훈련 자료를 만들어 보라.
  3. 한국 교회가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갱신되어야 할 부분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4. 전 세계에서 핍박받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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