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2] 하나님 나라와 선교 | 그리스도의 한 몸을 힘써 지키기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동하는 하나님 자신의 통일성에 있다. 동일한 하나님이 만방에 흩어진 만민을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은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만민을 모아 성경을 통한 친교를 이룬다…주 예수께 대한 동일한 신앙고백, 하나님의 통치를 향한 같은 희망, 같은 사랑으로 만민이 한 마음을, 세상에 대한 같은 봉사를 체험한다. 교회는 하나이다. 또 하나이어야만 한다 (한스 큉, 1992: 164-165).

오직 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토마슨 왓슨).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다양성 안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실현해 나간다면 교회와 선교에 있어서 일치와 연합운동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사람들은 복음의 보편적인 힘을 알게 된다. 교회는 하나됨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1) : 전도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2) : 제자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3) : 치유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4) : 은사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5) : 일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6) : 예배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7) : 정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8) : 평화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9) : 환경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10): 사랑 공동체

한 몸, 한 주, 하나의 교회

교회의 가장 강력한 심볼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유기체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양한 지체들의 공헌은 모두 하나의 몸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따라서 교회는 은사공동체이면서도 동시에 일치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은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일치는 교회의 총체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전 세계에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자유인과 노예인,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함께 모여 함께 예배하고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교회의 하나됨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델에 근거한다. 오시엑 회의(Osijek Consultation, 1999: 2)가 선언한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교회의 존재와 타 교회와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교회의 분열과 현대 교회에서 선교의 경쟁 심리는 제도(institution)나 교제(fellowship)로서의 교회의 생명이 경쟁적인 비삼위일체적 모델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교회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한 분의 창조주요 한 분의 구속자라는 데에 있다.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본질적으로 개인들이 아닌 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다(데이빗 보쉬, 2000: 687). 교회는 예배의 형식, 전도의 방법, 지도력의 스타일, 그리고 신앙의 표현 방법 등에 있어서 다양할 수 있으나, 한 몸과 한 성령, 한 소망과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 그리고 한 하나님을 공유한다 (고전 12:13).

교회는 한 분이신 주님을 증거해야 한다. 공동의 증언은 선교에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회들의 통일성의 자연스런 결과가 되어야 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WCC, 1982: section 23). 교회가 선교적이 되는 것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보편성을 통해서이다.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에큐메니컬 시대가 선교의 시대를 대체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양자를 모두 오해하는 것이다. 둘 중의 하나를 잃어버린다면 둘 다를 잃어버릴 수 있다. WCC의 나이로비 총회(1975)는 교회 통일성의 목적이 세상이 복음을 믿도록 만드는 데 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하였다.

에큐메니즘에 대한 이해

교회일치운동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용어는 에큐메니즘이다. 에큐메니즘이란 용어는 집이나 거주지를 의미하는 헬라어의 ‘오이코스’(oikos)에 기초한다.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는 에큐메니즘의 정의 뒤에 놓여있으며 그 의미는 단일 가족을 넘어 지구에 거주하는 인류를 시사한다. 에큐메니즘은 전 세계에 복음을 선포하려는 모든 교회의 모든 과업과 관련된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선교운동과 하나됨을 향한 선교과업을 모두 다 의미하며 단지 양자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Raiser, 1999: 189). 에큐메니즘에 대한 관점은 크게 세가지로 나뉠 수 있다 (Robeck, 2000).

첫째, 에큐메니즘을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통일 운동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논의는 이론적이고 기술적이고 신학적이다. 이 관점은 즉각적인 해결책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초조하게 한다. 둘째, 에큐메니즘을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 평화와 불의의 극복을 위해 일하며 문화나 타종교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도 본다. 셋째, 에큐메니즘을 지구 전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보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죄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 인간 죄와 탐욕의 광범위한 함의점들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전쟁 무기, 환경 문제 등 지구에서의 청지기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필자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간의 관계나 기독교인과 피조물과의 관계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인 상호간 관계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복음 안에서의 하나됨에 대한 기반이 없이 사회변혁에 무조건 뛰어드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 상호간의 하나됨을 위한 노력은 19세기의 선교운동에서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지만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특히 1960년대 이후 가장 활발하게 발전이 되었다. 또한 선교와 교회 일치운동의 제도적인 발전은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립과 발전에 힘입은바 크다.

그러나 교회일치운동은 WCC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1989년 이후 WCC는 자신들이 광범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의 단지 한 부분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전통을 이어받는 제도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으로는 세계로잔운동(1974년 이후)이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국제복음주의선교신학자협의회(INFEMIT) 등이 있다. 또한 우리는 기독교에서 가장 큰 양대 기구인 로마 카톨릭과 오순절 간의 대화가 30년 가까이 발전해 온 것을 목격해 왔으며 90년대 초부터 비슷한 대화가 오순절교회와 세계 개혁주의 교회 연합(The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과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대화에는 진지함과 인내 그리고개방성이 요구된다. 제리 샌디지(Jerry Sandidge, 1988)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대화의 열매들은 교회 통일성의 차원에서 너무 조급하게 기대되어서는 안된다”.

한국 교회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갖가지 종류의 연합 기관이 있다 (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 기독교방송, 대한성서공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등). 여기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다른 단체들이나 기구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회원으로 하는 협의회이며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일치운동은 KNCC 안에 다 수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 일치운동은 기구연합이 해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를 역사에서 증거하기 위한 것이냐가 가장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권이나 기득권을 떠나 같은 목표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재정, 2000: 240-241). 교회나 선교 연합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수용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개교회 중심주의나 교파 이기주의를 떠나 교회일치운동의 근본정신을 이해하는 지도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회 일치운동에 대한 참여 방법

교회일치의 본질을 가시적으로 끌어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에큐메니즘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이 하나의 획일적인 실체라고 보면 잘못된 것이다. 에큐메니즘은 실제로 다양한 차원에서 여러 가지 다른 양상으로 발생하고 있다(cf. Pfister, 1999). 에큐메니즘의 차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는, 교인들 간의 차원이다. 무엇보다 먼저 지역교회는 하나됨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사회적 계급, 배경의 차이, 성, 나이 등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교회론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복음은 강력한 힘이 있다. 또한 어떤 기독교인들이 다른 신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의, 평화, 또는 환경의 문제까지 협력해 나갈 때 그것은 이미 넓은 의미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할 때 그들은 이미 에큐메니컬 헌신을 했다는 것을 단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교회 리더십의 차원이다. 교회 지도자들 간에도 협력 및 일치 운동이 일어날 필요가 있다. 강단을 교류한다든가 교회연합 사업을 함께 추진한다든가 교파를 초월하여 지역 사회를 섬기는 선교에 함께 참여하는 것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셋째는, 제도적, 교단적 차원이다. 교단적 차원의 협력과 교류가 없이는 교회일치 운동이 더 승화되기 힘들다. 예를 들어, 개교단 차원의 선교전략보다는 교단의 선교국끼리 조정과 협력을 통하여 함께 세계선교 전략을 수립하고 연구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 또 교파연합이 쉽지는 않더라도 계속 노력해 볼 가치가 있다.

넷째는, 학문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이다. 신학대학 간의 교류와 연대도 교회일치에 크게 공헌하는 것이다. 필자는 현재 한국 선교학회의 정회원인데 정기모임에 가면 초교파적으로 선교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거나 강의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의 교파나 신학적 입장을 초월하여 함께 토의하고 고민하는 그 곳이 바로 연합사역의 한 장이 되는 것이다. 학문적 차원에서도 에큐메니컬 신학에 대해 정립해 나갈 필요가 있다. 신학교에서는 미래의 지도자가 될 신학생들에게 에큐메니즘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교회일치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서로 나누는 것이다. 사역을 나누고 은사를 나고 재정을 나누고 고난을 함께 나눠야 한다 (Kirk, 1999). 나눔이 없이는 협력과 일치가 가능하지 않다. 나눔이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높은 지체와 낮은 지체가 없듯이 교회의 선교 사역에도 “높은 교회”와 “낮은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 협력, 파트너십 등은 앞으로의 선교에 있어서 깊이 명심해야 할 중요한 개념들이다.

교회 일치운동의 유익

성장하는 교회들이나 주요 교단들은 교회일치운동을 무시할 잠재적 위험성이 크다. 자신들도 모르게 승리주의(triumphalism)과 엘리트주의(elitism)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선교와 교회의 일치운동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 중의 하나는 힘의 분배의 문제이다. 선교사역이나 의사결정에서 누가 힘을 행사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모든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성경은 주어진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전 4:1; 미 2:1-2). 힘은 쉽게 변질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힘에 대한 일반적 관점을 그리스도를 통해 재조명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롬 1:16). 그러므로 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힘의 시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힘은 희생적 사랑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Kirk, 1999).

만약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풀러신학교의 교수인 세실 로벡(Cecil M. Robeck, 2000)이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기독교인들이나 다른 기독교 조직들을 외면하려고 하는 교회들은 종파적인 형태를 향해 움직이는 경향을 보일 수 있으며, 관용이 없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부분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형제 자매들을 외면하고 혼자서 선교여행을 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다.

에큐메니컬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인가? 첫째, 선교의 세계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회는 사회와 선교 영역에서 계속해서 다원주의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비록 관점이나 견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상호협력과 대화는 최상의 길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에게 기독교와 선교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주고 나눌 수 있다.

둘째, 성령운동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다. 필자는 작년에 독일에서 동방정교회 사제들과 교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동방정교회에 대한 필자의 무지와 오해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내가 속한 교회나 교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와 인류 역사가 모두 다 성령의 무대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앞으로 카톨릭이나 동방정교회로부터 그리고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이나 다른 전통들과 연계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cf. Kärkkäinen, 1999: 216). 현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의 운동 안에만 제한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다른 기독교 전통들과 이 세상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에 있어서 의미의 지평선(horizon of meanings)을 확장하고 참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계선을 포용하게 만들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개방성을 향하여

교회 일치운동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한국의 오순절교회들도 90년대에 들어와 교회연합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오순절 교회들이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움으로써 그 정체성이 흐리게 될 것인가? 오순절적 정체성은 자기 규정의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의 정체성이 성령과의 만남과 성령의 능력 부여에 있다면, 성령에 대해서 단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증언과 에큐메니즘에 대한 노력을 통해서 그 정체성의 시사점들을 개발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교회 일치운동의 생명력은 그 개방성에 있다. 교권에 의해 장악되는 운동은 행정적 통제는 가능하나 생명력은 없다 (강문규, 1992: 98). 서로 나뉘게 하는 개신교의 선교분열 바이러스를 치유할 약은 교회 일치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교회의 총체성의 본질을 성령 안에서 자각하는 데에 있다. 성령의 선교적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이해하고 서로 개방적이며 또 제도를 뛰어넘는 하나됨의 생명력을 제공해준다. 교회의 통일성을 상실하는 것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죄이다.

교회의 통일성을 위한 연습은 지역 교회 안에서부터 세계선교 마인드로 시작해야 한다. 편협한 사고의 틀을 깨기 시작해야 세계 선교에 동참할 수 있다.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바로 오늘날 현대 교회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싸우는 교회가, 분열된 교회가 선교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지역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연합하고, 지역 내에서 교회가 연대하며, 또한 국가적, 세계적 이슈들에 대해 교회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와 신학적 반성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일치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교회의 하나됨이 왜 복음전도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2. 여러분이 속한 교회나 지역에서 에큐메니즘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겠는가?

3. “교회일치의 시작은 서로 나누는 법을 배우는 데서부터이다”라는 말에 대해 논평해 보라.

4. 한국 교회의 교회 일치 운동사에 대해 조사해 보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라.

1 Comment

  1. 메큐메니쥼?^^^^
    어렵네요. 그렇지만 알수있는 말씀은 성령안에서 하나가 됨으로 서로의교회가 나누는것. 내가속한 교회가 목사님이 항상말씀하시는 지역에서의 나눔에서부터……
    그리하여 복음안에서 교회가 일치가될수있는것. 교회리더쉽의차원????????????????????

    ***그때 그 사람 두 자로 줄이면? (아~~~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