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0] 하나님 나라와 선교 | 개인과 공동체 치유하기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은 그분의 가르침의 일부였으며 그분의 말씀 선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분의 치유 사역은 그 말씀을 구체적인 현실로 보여주었다 (Greig and Springer, 1993: 20).

예수의 치유 기적은 비구두적인(non-verbal) 메시지의 전달이며 하나님 나라의 현존적 증거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질병 대신에 건강이, 슬픔 대신에 기쁨이, 죽음 대신에 생명이 있다 (홍기영, 2000: 28-29).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갖가지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진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역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세 번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질병이나 아픔 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역이었고, 또한 교회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1) : 전도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2) : 제자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3) : 치유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4) : 은사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5) : 일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6) : 예배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7) : 정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8) : 평화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9) : 환경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선교(10): 사랑 공동체

예수의 치유 사역과 하나님 나라 (Jesus’ Healing Ministry and the Kingdom of God)

치유 사역은 설교와 가르침의 사역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이러한 사역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치유라는 헬라어 단어에는 소조(구원하다), 아이오마이(육적, 영적으로 치료하다), 휘기아이노(좋은 건강 상태에 있다) 등이 있는데 이것은 전인적인 구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회복하기 위하여 오셨다. 육체와 영혼의 망가진 것들을 치유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적인 치유는 주님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을 비중 있게 취급하고 있다. 복음서의 5분의 1 정도가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과 관계가 있다(Kelsey, 1972: 242-245).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표적들”(signs)은 대부분 치유의 기적들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한 치유 형태는 말씀(21회), 접촉(13회), 믿음(본인과 타인의 믿음 12회), 귀신축출(11회), 그리고 말씀선포(8회)였다(홍기영, 2000: 18-20). 그리스도의 치유의 동기는 진정한 사랑과 긍휼하심이었고 그분은 성령의 권능으로 이러한 치유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치유 사역을 통해 예수께서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건으로 가시화되는 모습을 나타내셨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4:23)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통해 치유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존 윔버(John Wimber)는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며(몰트만, 1997: 86),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신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신유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상징이다. (2) 신유는 그리스도의 대속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3) 신유는 성령의 역사이다. (4) 신유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신유 선교의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정당성을 제공해 준다.

치유의 신학 (Theology of Healing)

치유는 하나님의 뜻이다. 치유의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치유의 목적을 정립하는 일이다. 병이 걸리는 것은 인간의 죄와 직접적 연관성이 있을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병과 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를 범하는 것과 질병에 걸리는 것이 항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셨다(요 9: 1-10). 모든 질병은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죄에 기인할 수 있지만 언제나 개인의 죄를 질병의 원인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요 9:3)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영광을 나타낸다. 그러나 치유를 받던 받지 못하던, 또는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다. 질병의 원인보다 중요한 것은 질병의 목적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것처럼, 치유 사역은 성령보다는 율법과 전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긴장과 불만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그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분의 치유 사역은 십자가 사역으로 인도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마이클 하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큰 치유라고 말한 바 있다(1988: 226-227):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이 샘물은 치유의 바다 속으로 전 세계를 잠기게 하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치유의 중심부로 보지 못한다면 예수의 치유에 대한 우리의 집중적인 관심은 실패의 행위가 될 것이다…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그것은 가장 큰 기적이며 가장 큰 치유이다. 그러나 치유는 주변적인 은혜가 아니라 그 복음 메시지의 중요한 증거였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반사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에 대한 믿음은 육체와 영혼의 궁극적 회복을 약속하고 보장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 사역에 관계되지 않는 성령의 은사나 활동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치유는 (영혼, 정신, 육체의 치유이든, 또한 약이나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든) 고난받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관계되어야만 한다(Dickinson, 1995: 304).

치유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신유 교리에 있어 “믿는 자의 특권(privilege)”과 “믿는 자의 권리”(right)는 구분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신유는 믿는 자의 특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이다. 반면 권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을 주장하는 요구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인한 신유는 믿는 자의 특권이지 믿는 자의 권리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신유 사역에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비록 하나님이 신유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성이나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유의 신학화 작업에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헨리 나잇 3세(Henry knight III, 1993)는 신유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즉, 하나님의 신유의 약속에 대한 충실성)과 하나님의 주권(즉, 언제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유)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이 있어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신유의 약속에 대한 신실성은 어떤 것이며 신유에 대해 인간의 책임성(믿음)은 어디까지 요구되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치유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주권을 어떻게 행사하시는가? 우리는 신유에 있어 인간의 믿음의 필요성에 대한 예들이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의 예들(바울: 갈 4:13, 디모데: 딤전 5;23, 엘리사: 왕하 13:14,20)을 다 찾아볼 수 있다.

헨리 나잇 3세는 기독교 교단이나 운동에 따라 어느 한쪽에 대한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둘 사이의 통합적인 노력이 계속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유에 대한 미래의 신학적 작업은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 그리고 신실하심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 여부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치유의 사회학 (Sociology of Healing)

20세기의 오순절 운동의 확산은 치유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 서구 사회의 역사적 발전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보는 인본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믿음의 치유나 기적 같은 것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신유 사역을 통하여 서구식 이원론을 배격하고 영과 육체 사이의 분리되지 않는 통전성을 발전시켰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이 신유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경험에 기반을 둔 신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오순절적 신유의 수용은 개인의 전인감(sense of wholeness)을 회복해 주며 성경적 인간관의 회복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홍영기, 2000). 또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누릴 수 있는 깊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었다(Peterson, 1998).

오순절 운동은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대중들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제 3세계에서의 취약한 공공 보건의 심각한 상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순절 교회들이 급증하는 곳은 근대 문명의 혜택이 부족하거나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된 서민 지역들이었다(이남섭, 2000: 128-134). 이러한 환경은 오순절적 믿음의 치유 양식이 더 쉽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질병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매일의 경험이 되고 있다. 예수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고, 치유자나 의사가 없는 양과 같다. 많은 가난한 나라의 교인들에게는 신적 치유하심이 의료적 돌봄의 유일한 가용 선택으로 제공된다.

치유에 대한 오순절적 공헌은 깊은 사회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초점을 둔 복음 사역의 결과이며 복음의 내용이다. 이사야 53장 4절의 “우리의 병을 지고”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sins)와 죄의식(guilt), 그리고 죄의 결과들(consequences)로부터의 해방과 자유함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물론 이 의미에는 육체적 질병의 치료도 포함된다(마 8:16-17)).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한 신유의 교리의 의미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것 같다. 개인의 질병과 사회 가운데에서 고난과 불의와 질병에 처해 있는 인간의 곤경을 분리하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치유에 대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바젤 대학의 교수인 프랭크 마키아(Frank Macchia, 1999)도 신유에 대한 초점이 이 세상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회복(육체의 구속을 포함한)에 대한 비전을 흐리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개인의 아픔과 사회적 고통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가난으로 인한 질병의 문제는 심각하다.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13억 가까이 된다. 가난 퇴치를 위해 노력해 온 세계은행(World Bank)은 가난으로 인한 질병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대안책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고 까지 말할 정도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AIDS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여 1998년 한 해에만 280만명이 AIDS로 목숨을 잃었다. 남의 아픔과 질병, 그리고 고난에 동참하여 함께 아파하고 돕는 기독교 복음의 능력이 신유 선교에서 성찰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의 신유의 복음은 인간의 전인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데 비전을 둔다. 오순절 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들은 신유 선교의 사회적 함의점들을 전인적 선교에 비추어서 지속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교론이다.

교회에서의 공동체적 치유 선교(Healing Mission in the Church)

하나님 나라의 치유 선교는 무엇보다 치유 사역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도냐 사회참여냐 하는 논쟁에서 간과되었던 것이 바로 치유나 축사 등의 선교 영역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치유는 신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한 치유는 그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도 가능하다. 오늘날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가 더 필요한 시대이다. 치유 선교는 또한 전인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도나 사회 참여 등은 모두 다 전인적 치유 선교 안에 포함될 수 있다. 또 교회는 치유 선교의 원리와 전략에 대해 계속해서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교회는 각종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치유하도록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을 가지고 또한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치유선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 선교를 치유 공동체로 승화시키는 일이다. 치유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치유는 주로 예배 공동체 가운데서 발생한다. 전능하신 치유자(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양하는 데 있어 믿음의 공동체의 역할은 모든 교회들을 위해 중요하다. 그래서 치유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대하는 성례적인 영성(sacramental spirituality)을 가지고 있다.

치유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치유는 단지 개인적 질병의 치유로만 끝나지 않는다. 치유받은 자는 자신의 치유를 간증하며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하심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공동체적 증언은 교회 공동체 신학을 살아있게 만들어 주며 치유 복음의 능력을 강화시켜 준다. 이러한 경험들이 성령 안에서 승화될 때 치유 선교의 사회적 변혁 능력이 창출될 수 있다. 오늘날 사회적 부정의로 인한 개인의 고통과 질병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비전이 개인의 신유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은 (1)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며 (2)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힘있는 치유 공동체를 건설하게 하며 (3) 단지 내적으로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 세계를 치유하며 변혁시켜 나가는 공동체를 만들게 한다. 전인적인 치유를 지향하는 치유 사역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며 교회는 능력있게 성장해 갈 수 있다. 치유선교는 분명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방법에 그분의 ‘말씀’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2. 치유와 구원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3. 신유 사역에 있어서의 부정적인 사례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러한 점들을 어떻게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4. 여러분이 속한 교회(공동체)를 치유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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