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위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얼굴이 제일 먼저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의 모습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그의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즉시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결국 세계 최고의 걸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에게 잘 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또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핍박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의 쓴 뿌리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를 핍박하고 고통을 준다고 해서 내 안에 미움을 가지고 그를 저주한다면 어떻게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때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순수하게 만드십니다. 우리 안의 교만의 찌꺼기와 거짓말하는 습성 등을 다 짜내십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자나 핍박하는 자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명자의 도구로 쓰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말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크게 욕한다고 저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저 사람이 망하면 좋겠다, 어구 저 사람 진짜 밉다” 하고 생각하는 것도 저주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서라도 저주의 생각을 하지 말며 내 방, 즉 즉 남이 모르는 조용한 곳에서라도 저주하지 말라고 말하셨습니다(전 10:20). 저주를 하게 되면 복이 떠나고 그 저주가 오히려 나에게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 109:17-18). 반대로 우리가 고통을 주는 사람을 축복하면 그 사람이 변할 수도 있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축복이 나에게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축복의 권세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 우리의 가족과 교회와 직장과 사업체를 축복해야 합니다(시 118:26, 창 12:3).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 뿐 아니라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 백 명을 사랑한 것보다도 원수를 한 사람 제대로 사랑한 것이 더 상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5:46-48).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하기가 쉽지만, 나의 원수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도 아닙니다.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을 가장 많이 한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예수님의 사랑의 형상이 내 안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인관계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이러한 작업을 하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하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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